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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시간

걷기 여행자 2024. 10. 29. 11:52


마침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교체공사가 시작되고,
나는 시방 적응의 시간을 갖고 있다.

책장 정리를 하다가,
서가 한 모퉁이에서 숨은 듯 감추어 있는
책 한 권 꺼내어 읽고 있다.
언제부터 그 책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내 눈에 띄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도종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중에서
제1부 '모두가 장미일 필요는 없다'를
읽고서,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다"란 말에도 수긍하게 된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산국화이어도 좋고
나리꽃이어도 좋은 것이다.
아니, 달맞이꽃이면 또 어떤가."

나는 지금 인연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 책을 만난 것도 인연이고,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인연이다.
사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만난 꽃들, 내가 만난 사람들,
혹여 인생길에서 만난 작은 행운이나 행복이라 믿은 모든 것은
다 인연따라 내게 온 것이고,
인연따라 내게서 떠나갔다.

지금 내가 이러한 처지에 있는 것도 인연이요,
그러한 처지에서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사무치는 것도 또한 인연이리라.
그러니, 인연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
자족의 삶을 꾸려갈 것,

시인의 글에서처럼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도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우주의 일부이다.
인간이 소우주이면 산도 토끼 한 마리도 떡갈나무도 개미도 붓꽃도 저마다는 다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잠시 같이 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절해야 한다. 삼보일배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대지에 절을 하며 겸손해지고 대지에 절하며 사죄해야 한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도종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중에서
제2부 '고요히 있으면 물은 맑아진다'는
인연이 닿으면,
저절로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큰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녀딸이 집에 오게 되면,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들려 주어야겠다.
그 다음엔 인천의 작은 아들부부도
이 책을 돌려 읽을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가면 좋겠다.